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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스크랜턴 선교사와 메리 스크랜턴 선교사

Updated: Jan 13, 2021

예일대/콜럼비아 의대 출신 스크랜턴,

모든 특권을 버리고 조선의 병든 노비들을 섬기다 사라지다.


윌리엄 스크랜턴 (William Scranton)

윌리엄 스크랜턴 선교사는 1856년 뉴헤이븐에서 태어났다. 1878년 예일대를 졸업한 후 1882년에는 뉴욕의 콜럼비아 의대를 졸업하고 의사가 되었다. 그 후 잠시 오하이오 클리브랜드에서 개업을 하다가 다시 1884년에 감리교 목사로 안수받고 아펜젤러 선교사와 함께 감리교에서 조선 선교사로 파송되었다. 그 때 스크랜턴의 어머니 메리 스크랜턴(Mary Scranton)도 조선에 선교사로 파송되어 함께 사역하였다. 1884년 2월 어머니와 아내, 그리고 아펜젤러 선교사 부부와 조선에 도착하였으나 조선의 정세불안으로 일본 요코하마에서 적절한 시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아펜젤러와 일본에 머물면서 고종황제의 조카이며 개화파였던 박영효를 만나 한국어를 공부하며 조선 선교를 준비하던 중 1885년 5월 드디어 조선에 입국했다. 조선의 왕립병원이었던 제중원에 일하였고, 서울의 정동에 ‘시병원’이라는 병원을 개원하였다. 그는 양반들과 부유층이 사는 사대문안 정동에서의 치료와 사역에 안주하지 않고 조선의 가난한 서민들(평민과 천민)이 사는 사대문 밖 서울의 외곽으로 나가서 병원을 열고 그들을 치료하였다. 또한 그는 상동교회, 아현교회, 동대문 교회 등을 개척하였고 한글로 성경을 번역하여 배포하기도 했다. 스크랜턴은 일본편에 섰던 미감리교 아시아지역 감독과의 마찰이 발생한 1907년까지 조선에 머무르며 병원을 열어 조선의 병든 이들을 위해 의료사역을 펼쳤고 교회를 세워 설교자와 목회자로 복음을 전했으며 일본의 조선 침탈에 맞서는 조선인들을 도왔고 일본 제국주의편에 선 서양 선교사들과 각을 세우며 조선을 옹호했다. 특히 상동교회에서 민족지도자 이동녕, 박용만, 주시경, 이회영, 전덕기 등을 길러냈다.




메리 스크랜턴 (윌리엄 스크랜턴 선교사의 어머니)

메리 스크랜턴은 아들 윌리엄 스크랜턴과 함께 51세의 나이에 한국 선교사로 파송되었다. 그녀는 한국에 들어 오기 전 일본 요코하마에 머무는 시기에 아들과 함께 박영효에게 영어를 가르치기도 했다. 1885년 아들과 조선에 들어 온 그녀는 아들 스크랜턴이 의료 선교를 하는 동안 조선의 여성들을 위한 교육 사역을 했다. 아들이 정동에 시병원을 설립하고 환자를 돌보는 동안 그녀는 같은 장소에 아들의 치료를 받은 여자 아이들을 대상으로 “이화학당”을 열고 여성 교육을 실시하였다. 메리 스크랜턴이 세운 이화학당은 현재의 이화여대가 되었다. 이화학당 외에도 아들 윌리엄 스크랜턴과 정동 시병원 옆에 여성이 진료 받을 수 있는 여성전용 병원인 ‘보구여관’을 설립하였다. ‘보구여관’은 여성 의료 인력 양성에도 힘쎴고 이 병원은 나중에 ‘이화여대 부속병원’이 되었다. 그녀는 진명 여학교와 달성매일학교도 설립하였고, 궁극적으로는 조선의 여성이 하나님의 뜻과 사랑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우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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